새로운 동행

2017년 어느 날 저는 남편의 행동이 평소와는 다름을 느꼈습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조심스레 검사를 권유했을 때 남편은 요즘 회사 일로 스트레스가 많아 그렇다며 두 번 다시 그런 말 꺼내지 말라고 불같이 화를 냈습니다. 그 후 저는 더 이상 검사 얘기를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다 2018년 남편과 함께 해외 출장 겸 여행을 마치고 한국에 돌아오는 과정에서 문제가 생겼습니다. 

입국장에서 화장실을 갔던 남편이 저를 바로 앞에 두고도 찾지 못하고 배회하였습니다. 심장이 덜컹 내려앉았습니다. 순간 너무 단호하게 검사를 거부하는 남편이 스스로 문제점을 인식할 시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여 마음이 찢어졌지만 잠시 동안 남편이 배회하는 것을 지켜 만 보았습니다.

이 사건을 계기로 남편은 치매 검사를 받았고, 남편 나이 56세에 '치매경계단계' 라는 진단을 받았습니다.남편은 결과를 인정하고 받아들이기엔 너무 젊은 나이였기에 본인에게 도움이 되는 것들은 외면하면서 술과 담배로 현실을 회피하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그런 남편을 그저 바라만 볼 뿐 아무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이후 정기적으로 실시하는 검사 결과는 담당 교수님도 당황하실 정도로 빠르게 나빠졌지만, 여전히 남편은 받아들이지 못하고 ‘치매’ 라는 단어는 꺼내지도 못하게 하였습니다. 저는 처음 남편의 상태를 알게 된 이후부터 ‘상대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받아주자, 좋아질 수 있다.’ 라고 스스로에게 되 뇌었던 희망이 깨어졌습니다. 남편이 원망스러웠고, 미래에 대한 두려움이 엄습해오는 시간이었습니다.

그렇게 2년을 보냈습니다.

2020년 운영하던 회사를 정리하고 난 후, 남편과 함께 있는 시간을 보내며 인터넷 검색으로 찾은 인지 학습도 해보고 그림 그리기도 함께 다녔습니다. 하지만 갈수록 인지 학습을 할 수 있는 날보다 못하는 날이 더 많아졌고, 일반인과 함께하는 그림 그리기는 어느덧 남편에게 너무나 버거운 일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렇게 서서히 남편은 자신의 상태가 전과는 다름을 인정하기 시작했습니다.

22년 1월 21일, 치매 등록을 끝까지 망설이고 꺼려하는 남편의 팔짱을 끼고 ‘당신에게 지금 필요한 것을 해줄 수 있는 곳은 여기밖에 없는 것 같다.’ 며 설득하여 함께 중곡동에 있는 광진구치매안심센터로 향했습니다.  

센터 직원의 친절한 안내로 치매 등록 절차를 마치고 운영 프로그램에 대한 안내도 자세히 받았습니다. 또 지금 당장 집에서 할 수 있는 인지 학습지와 필요한 용품을 챙겨주셔서 한가득 안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치매라는 사실을 거부하는 남편에게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나’, ‘억지로라도 무언가를 시켜야 하는 것인가’ 등 2년이 넘는 시간 동안 나에게 주어진 질문에 답을 해줄 사람은 없었고, 유일하게 상담할 수 있는 곳은 3, 4개월에 한번 잠깐 만나는 담당 교수님이 전부였습니다. 매 순간 내가 옳은 것인지 잘하고 있는 것인지 갈팡질팡했고, 혼란스러웠고, 불안함의 연속이었으며 마음을 나눌 곳 하나 없었습니다.

또 자신의 상태를 인정하지 않아 이렇게 우리를 고립시키는 남편이 원망스러웠던 나날을 보내야했었습니다. 그랬던 그 모든 문제가 단번에 해결되는 느낌이 들면서 가슴 한가운데 박혀있던 커다란 돌덩어리가 사라지는 기분이었습니다. ‘아! 나도 이제 의지하고 마음을 터놓을 곳이 생겼구나.’하는 마음에 나도 모르게 진득한 눈물이 났습니다.

남편에게도 그 날은 처음으로 자신이 치매 환자라는 사실을 인정한 날입니다. 그 마음은 또 어떨까 싶어 오랜만에 마주 앉아 좋은 이야기, 행복한 이야기, 희망적인 이야기를 함께 나누었습니다.

코로나로 인해 비대면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줌(zoom)수업에 참여하며 남편의 마음에 변화가 생겼습니다. 함께하는 사람들이 있으니 인지 학습에 대한 거부반응이 줄었고, 말수는 점점 많아졌으며 웃는 일도 많아졌습니다.

센터에서 한 달에 두 번씩 학생들을 보내주는 프로그램에도 참여하였는데, 학생들과의 만남이 좋았는지 이름을 기억하려고 수시로 ‘이름이 뭐냐, 언제 또 오냐’는 질문도 하고, 또 어떤 날은 학생이 방문하는 날 아침에 “오늘은 선생님 오는 날이네.” 라고 먼저 말하는 날도 있었습니다.

 스스로 적극적으로 참여하려고 하는 변화에 가슴이 뭉클해졌습니다. 무엇보다 인지학습, 신체활동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하는 남편의 모습을 통해서 현재 남편의 상태가 객관적으로 어떤지 판단할 수 있어 남편을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5월부터 시작된 대면 수업은 남편에게 보약과 같은 시간을 주고 있습니다. 2시간 동안 많이 행복해하는 남편을 보면 그냥 흘러보낸 4년의 시간이 아쉽기도 하지만 지금이라도 인정하고 적극 참여하는 남편이 참으로 고맙습니다. 치매안심센터에서의 여러 프로그램을 통한 남편의 변화가 저를 기쁘게 합니다.

그간 치매안심센터는 치매환자만을 위해 존재하는 곳이라 생각했었습니다. 그런데 광진구치매안심센터에서 운영하는 치매가족을 위한 프로그램 참여를 통해 많은 행복을 느끼는 저를 발견했습니다.

4월 시작한 힐링 프로그램 ‘싱싱드림’ 이 처음으로 다른 치매환자와 그 가족을 만나는 시간이었습니다. 조금은 긴장되고 떨리는 마음으로 참석하였는데, 텃밭을 가꾸며 마음껏 치매에 대해 이야기 할 수 있어 기뻤습니다. 친구나 지인의 만남에서는 치매가 나만의 관심사이기 때문에 이야기의 주제가 될 수 없었고, 남편의 치매에 관한 이야기는 모임의 분위기를 망칠 것 같아 이야기를 꺼낼 수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 모임에서는 눈치 볼 것 없이 마음껏 이야기를 할 수 있었습니다.

남편도 자신과 비슷한 사람들을 만나고 직접 이야기하면서 본인의 상황을 더 편안하게 받아들이고 그 시간을 즐겼습니다. 또 가족을 위한 교육인 ‘희망다이어리’ 수업은 미래에 대한 두려움보다 어떻게 하면 우리가 행복해 질 수 있을지 배울 수 있는 귀한 기회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세상은 알록달록해’라는 프로그램은 저에게 위로되는 시간이었습니다. 남편과 하루종일 같이 생활하면서 가지게 되는 마음의 짐덩어리와 고통을 여러 가지 방법으로 표현하는 법과 나를 위하는 방법들을 배우고 함께 실천하면서 경직된 마음이 조금은 부드러워졌고, 속에 담아둔 이야기를 내어놓고 이야기할 수 있었습니다.

다른 보호자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세상이 왜 회색빛으로 보이는지 공감하였고 ‘타인의 고통위에 나의 행복을 쌓지 말라’는 격언이 무색할 정도로 ‘나는 아직 괜찮은 단계구나.’는 생각에 행복한 순간도 있습니다. 또 앞으로 펼쳐질 상황에 대해 간접적으로 경험하며 앞으로 닥칠 미래에 대한 준비의 시간도 가질 수 있었습니다.

이 프로그램을 통해 잠시나마 세상을 알록달록한 빛으로 볼 수 있게끔 나와 보호자들이 위로받고 있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렇게 치매안심센터의 프로그램을 하면서 선생님들의 격려와 조언이 나의 든든한 의지처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치매가족 자조모임인 ‘오미자’ 모임은 이제 나의 힐링의 시간이 되었습니다. 다른 치매가족분들은 막내 치매가족이었던 저에게 ‘리더’라는 이름을 붙여주셨습니다. 아직 많이 부족하지만 열심히 모임에 참석하고 카카오 단체톡 등으로 함께 의지하며 지금도 열심히 활동하고 있습니다.

가족프로그램들을 통해 치매를 제대로 알지 못해 생겼던 불안감이 해소되었고, 치매환자인 남편을 대하는 나의 태도를 뒤돌아볼 여유가 생겼습니다. 지난 날 가끔 남편을 정상인으로 착각하고 왜 저렇게 내 맘을 몰라줄까 하는 불편한 마음에 말과 행동으로 상처를 주었는데, 환자라는 사실을 인식하고 이해하기 시작하면서 남편을 재촉하고 답답해하던 마음으로부터 조금은 자유로워졌습니다.

잘하고 있는 부분은 나 스스로를 칭찬해줄 수 있게 되었고, 수정이 필요한 부분은 남편에게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변화해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남편을 있는 그대로 수용하면서도 환자로, 소중한 동반자이면서도 건강한 5살 아들로 바라보고 함께 웃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되니 요즘은 하루가 무탈합니다.

저는 40대 이후로 지금껏 지역사회에 도움이 되고자 여러 봉사활동을 해왔습니다. 이제는 남편과 치매가족을 위해 봉사할 수 있는 시간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제가 많이 배우고 힐링할 수 있던 것 같이, 새롭게 ‘치매’상황에 놓인 환자와 가족들에게 작은 도움이라도 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렇게도 소중하고 무탈한 하루를 다른 가족들과 함께 나누며 지켜나갈 것입니다.

감사합니다.